오늘의 능력

은혜를 방해하는 것

갈라디아서 2 (NKRV)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게임으로 하루를 헛되이 낭비하지만 않는다면 게임을 즐기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아내와 함께 모노폴리(역자 주: 주사위를 사용하는 탁상 게임의 하나)를 할 때 다 잃지 않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요즘 저는 일찌감치 합병을 시도하곤 합니다.  이와 비슷한 것을 우리 아이들에게서도 발견하는데 그것은 아이들이 새로 배운 것에 흥분하기도 하지만, 때론 새로운 놀이에 너무 빠져들거나 지치게 되면 낙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낭패감은 터무니없는 결과로 유도 합니다. 막 석방된 죄수에게 있어서 감옥의 여러 가지 제한들이 자유롭기 때문에 오는 부담보다 더 친근한 것처럼 보이듯이 말입니다.  그동안 익숙해진 행동 양식이 새로 얻은 독립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노예근성을 갖게 만들 수 있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우리가 옛 생활(역기능)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렇게 갈망했던 바로 그 관계를 우리 스스로 파괴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은혜를 파괴하기도 하고, 쓸모없게 만들거나 한쪽으로 밀어 놓을 수 있습니다. 고넬료에 관한 신비한 환상을 보고 사도 베드로는 복음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역자 주: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그 전에 유대인들은 복음을 통한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열려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자 인종차별적인 옛 관습으로 되돌아가려는 유혹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단절의 벽을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역자 주: 갈 2:11-14 참조).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합법적인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의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거나 우리의 선행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을 치는 행위와 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의 길을 볼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우리의 옛 방법을 청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